Wednesday, May 13, 2009
Alfred Hansen (98x68, 2007)
Charcoal on Paper
Finding My Family
Studying Fine Arts in Canada made me aware of the significance and inevitability of culture and history. I was born in a multicultural country that prescribed no distinct ethnicity, and with virtually no knowledge of my own lineage, I felt a desperate need to resist the pervasive T.V. and hamburger heritage that seemed the only option. As an artist, I found myself in a sort of stylistic vacuum, selecting my modes of creation from a history that did not feel like my own. While it gave me freedom for experimentation and discovery, it left little meaning apart from the personal or arbitrary. As a result, I resolved to learn more about my family, which in time became an exploration of my county, self and art.
In addition to my cultural identity crisis, I was burdened, as many young Canadians, by unmanageable student debts. I had to find a way to solve this problem. I decided to go to South Korea and teach English. On the way, I stopped to visit my grandfather (Frank Macri) in Windsor Ontario. The last time I saw him was thirty years ago; I was four years old. When I arrived in Windsor, I was surprised to find an extended family that included aunts, uncles and cousins that I never knew existed. It was highly rewarding and informative in more ways than I had hoped. Of course the time was too short, as I had to get on a plane and travel several thousand miles, into a culture where I did not speak the language or know any of the customs. In truth, I knew almost nothing about Korea. One thing I did know was that my great uncle was waiting for me there.
Back in my hometown Winnipeg, Manitoba, my uncle George “Gary” Alfred Hansen, also strove to discover his roots. He was researching the family history from the Hansen (my mother’s) side. When I left for Korea he told me about my great uncle who was buried in Busan. Private Alfred Earnest Roy Hansen was killed on February 25th, 1951 while trying to advance with his unit (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to repel the invaders out of South Korea. I was told Alfred always looked up to his older brothers who served in WWII and my grandfather who was a police officer. Alfred felt his family had sacrificed a great deal to serve their country and to defend the oppressed. He was compelled to do the same. So when the Korean conflict began, he enlisted. The memories of war and its horrific events were still very fresh in the minds of many people then, so when an invading dictatorship entered South Korea it was seen as the only right thing to do.
Gary found my great aunt Clara, Alfred’s sister, to be an excellent source of information. She was very close to Alfred, being near in age. She remained in their birthplace, Spearhill, Manitoba, when many of the older siblings had gone on to the “big city” of Winnipeg. She was able to relay humorous anecdotes, like how Alfred would catch garter snakes to scare his sister Edith or anyone who did not know how harmless they were. Later, Alfred moved to Winnipeg to live with my grandfather, George. Clara would visit and help cook and clean for the hapless young bachelors. They came from a big family and were used to supporting each other in any way they could. Their upbringing instilled compassion and strong moral values. They cared for family, friends, neighbors and even strangers. It was this system of ideals that led Alfred to volunteer to help a country and a cause half a world away, for a people he had never met. Gary told me that after speaking with Alfred’s brothers and sisters, it was clear, that even decades later he was deeply missed. Despite their loss, all spoke proudly of his sacrifice and service in Korea and to his country.
I promised to visit the Busan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and lay flowers at Alfred’s grave. I would be the first from our family (the Hansens) to have the opportunity to do so. After a few months in Korea I was pleasantly surprised to find my newly discovered cousin Kimberly (from the Macri family) would also be coming to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We met in Busan, and with the help of some mutual Korean friends, we found our way to the UN cemetery. It was only then that the scale of this event became evident. The conflict had a profound impact on the history of Korea, as well as thousands of families around the world, including my own.
The beautiful grounds were pristine and picturesque with flowers and sculptures and architecture befitting the sentiment of solemn pride. Following a narrow path, we found Alfred’s grave directly adjacent to the base of a Canadian flag. It gave me a strange patriotic comfort that he was the closest to it. I recognized the flag as a symbol of home. It was as if the immediate area, where my great uncle laid, was a tiny piece of Canada.
When I knelt down to look at the plaque that marked his resting place, I was shocked to see his age was merely twenty-three years old. Being my grandfather’s brother, I mistakenly expected him to be an old man. Scanning some of the nearby headstones I realized most of the soldiers were younger than I, some being only eighteen. I felt a flood of emotions and thoughts of my family enter my mind. I thought of my own privileged upbringing, my grandmother, and how she taught our family the relationship between love and duty. I envisioned her son, my uncle Gary, who is a police officer in Canada. He carries not only the names of Alfred and my grandfather (George), but the moral principals that lead him to contribute to society as they did. I thought of my wonderful friends and the children I teach here in Korea and realized that without the sacrifice of Alfred and countless others, I would likely not have had the honor to meet them. The lesson to be gleaned from this inspiring experience was clear. Even thousands of miles away, I felt connected, at home, feeling the soundness of the morals Alfred was taught, and knew that they lived on in subsequent generations.
In response I have created a portrait as a tribute to Alfred’s contribution to the Korean War, our family, and my quest for understanding who I am and where I come from. I've learned that we are all in some measure, the sum of our actions, and that the past can inform us, as to what our actions may mean to the future.
나의 가족을 찾아서
Manitoba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나는 문화와 역사 사이의 중요성과 필연성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뚜렷한 민족성을 규정할 수 없는 다문화권 나라에서 태어났다. 나 자신의 가계(외가 쪽으로 한 두세대 위)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왜곡된 TV나 햄버거 전승을 반대할 필사적인 필요를 느끼는 것이 유일한 선택인 것만 같았다. 화가의 한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않았던 역사로부터 창작 방법을 선택함에 있어서, 나 자신이 일종의 방법상의 진공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실험과 발견을 위한 자유를 준 반면에,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자유재량에 의한 것은 별도의 의미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가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보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로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나 자신, 그리고 미술 속으로의 탐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문화정체성의 위기에 덧붙여, 나는 캐나다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연구자가 지니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을 안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아야만 했기에, 한국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과정 중, 나는 할아버지(Frank Macri)를 방문하러 Windsor Ontario에 들렀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30년 전 내가 4살 때였다. Windsor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숙모들, 삼촌들,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사촌들을 포함한 대가족을 발견하고 놀랬다. 그것은 더 많은 면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상당히 가치가 있는 수확을 얻게 했다. 물론 내 지역 언어로 말하지 않는 문화, 혹은 다른 어떤 관습도 모르는 문화 속으로 비행기를 타고 수천마일을 달려가야 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사실 나는 한국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의 상태에 있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은 나의 왕조부(할아버지의 형제) 되시는 분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고향인 Winnipeg, Manitoba로 돌아갔을 때, George "Gary" Alfred Hansen 삼촌은 또한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는 Hansen(외가 쪽에서)편에서 가족사를 조사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 그는 나에게 부산에 안치되어있는 나의 왕조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군인이었던 Alfred Earnest Roy Hansen은 1951년 2월 25일에 죽었는데, 그 당시에 그는 남한에 침입한 침략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그의 부대(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프린세스 페트리시아 캐나다 경장비 보병부대)들과 진군하고 있었다. Alfred가 세계 제2차 대전에 참가했던 그의 형들과 경찰관이었던 나의 할아버지를 존경했었다는 것을 들었다. Alfred는 그의 가족이 자신들의 나라에 봉사하며, 압제당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 큰 희생을 치렀다고 느꼈다. 그는 그와 같은 일을 해야겠다는 선한 도전을 받았고, 그래서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침략 독재국들이 한국으로 쳐들어 왔을 때 전쟁터에 지원을 했던 것이다. 전쟁의 기억과 그 끔찍한 사건들은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한 일처럼 보여 졌다.
Gary 는 훌륭한 정보의 출처가 되는 Alfred의 누이인, 왕조모 Clara를 찾아냈다. 그녀는 Alfred와는 매우 가까웠으며 나이도 엇비슷했다. 더 나이가 많은 형제자매들이 "대도시“인 Winnipeg로 가버렸을 때도, 그녀는 고향인, Spearhill Manitoba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Alfred에 관한 일화를 전해들을 수 있었는데, 그의 누이인 Edith나 혹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놀라게 해주기 위해 어떻게 얼룩뱀을 잡곤 했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Alfred는 나의 할아버지인 George와 함께 살기위해 Winnipeg로 이사했다. Clara는 불운한 젊은 독신남들의 집을 방문해서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곤 했다. Alfred의 가족은 대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서로를 부양하곤 했다. 그들의 교육법은 사람을 향한 연민과 강한 도덕적 가치를 심어주었다. 그들은 가족, 친구들, 이웃사람들 심지어 낯선 이방인들까지 돌보아주었다. 세상의 저 먼 곳에 있는 미지의 한 나라, 자신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을 돕기 위해 Alfred를 자원하게 한 것도 바로 이러한 궁극적 이상을 추구하는 시스템 때문이었다. Gary는 Alfred의 형제자매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가 너무나 그립다고 말했다. 비록 생명은 잃었지만, 그들 모두는 한국에 바친 그의 희생과 봉사정신 그리고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삼촌에게 부산유엔국립묘지에 방문해서 Alfred의 무덤에 헌화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묘비를 찾아가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우리 Hansen 집안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한국에 간지 몇 달 후 나는 새로이 알게 된 사촌 Kimberly (Macri가문 출신인)가 역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부산에서 만났고, 몇 명의 한국 친구들의 상호 도움 덕분에 겨우 유엔묘지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의 정도가 분명해졌던 것이 바로 그 때였다. 전쟁은 나의 가족을 포함한 세상에 있는 수천 명의 가족들뿐 만아니라 한국역사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던 것이다.
아름다운 땅들은 온갖 꽃들, 조각품들과 건축물들의 엄숙한 자부심으로 조화된 채, 자연적으로 잘 보존 되어 있어 마치 그림과 같은 모습이었다. 좁은 길을 따라가니, 캐나다 국기게양대 바로 근접한 곳에 Alfred의 무덤이 있었다. 국기와 가장 가까운 곳에 그의 무덤이 있었다는 것이 야릇한 애국적인 위안을 주었다. 나의 왕조부가 묻혀 있는 바로 그 곳이 마치 캐나다의 작은 부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무덤에 기록되어 있던 내용을 보려고 무릎을 굽혔을 때, 나는 그의 나이가 겨우 23세였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내 할아버지의 형제인지라 나는 당연히 그가 노인일거라고 오인했던 것이다. 근처에 있는 몇 개의 묘비를 훑어보는 동안, 대부분의 군인들이 나보다 더 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떤 이는 겨우 18세였다. 나는 가족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 자신이 할머니에게서 받은 특별한 교육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어떻게 그녀가 사랑과 소명 사이의 관계를 우리 가족들에게 가르쳤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녀의 아들인 나의 삼촌 Gary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는 캐나다 경찰관이었다. 그는 Alfred와 할아버지(Geroge)의 이름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했던 바가 사회에 기여하도록 이끄는 도덕적 원칙들을 삶의 지표로 삼았다. 이곳 한국에 있는 훌륭한 나의 친구들과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Alfred와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내가 그들을 만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감동적인 경험으로부터 수집되는 교훈은 분명한 것이었다. 비록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지만, 나는 Alfred가 배워왔고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도덕의 소리에 익숙해져 있음을 느꼈다.
이런 자극의 결과로, 나는 한국전쟁에 기여한 Alfred와 우리 가족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그리고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의 질문에 대한 이해의 표시로 초상화를 창작하게 되었다. 어쨌든 나는, 어떤 측면에서는, 그것이 우리 행위의 총 집약이라는 것과, 과거는 우리의 행위가 미래에 의미할 지도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David Frank Mac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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